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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김흥규] 폭탄주 문화 이대로 안 된다 (20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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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39 조회2,8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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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 때의 화가 김명국은 주광(酒狂)으로 유명했다.

술을 즐겨 한 번에 몇 말씩이나 마셔댔다. 취하지 않으면 재주가 다 나오지 않았고, 또 너무 취하면 취해서 제대로 그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술에 취하고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에서만 가장 뛰어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그린 걸작과 태작을 술을 마신 정도, 즉 덜 취한 상태와 만취한 상태, 그리고 알맞게 취한 상태에 따라 감별해낼 수 있다고 할 정도니 술이 창작의 촉매가 된 듯하다.



일전에 한 일간신문이 폭탄주문화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적이 있다.

양주와 맥주를 섞은 ‘양폭’이 ‘소폭’(소주 폭탄주)으로 이어지면서 폭탄주가 어떻게 지난 30년 동안 음주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는가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기사였다.



그릇된 남성문화의 표현



 조직사회에서 술은 필요악이다. 조직의 결속을 다지고 피로를 풀고 끈끈한 동지애를 도모하기 위해 불가피하다.

하지만 폭탄주와 같은 과도한 음주 형태는 그릇된 남성문화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곱게 볼 수만도 없다.

예컨대 꼭 독한 술을 거나하게 마셔야만 진짜 사나이로 대접받고 폭탄주를 차례로 돌려 마셔야만 끈끈한 의리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오류다.

실제로 폭탄주를 즐기는 이유가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고, 또 빨리 취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하니 그 동기 역시 썩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성경은 술에 대해 양면적이다. “술 취하지 말라”(롬 13:13; 엡 5:18)고 경고하나, 술 자체를 금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위장병으로 고생하던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약용으로 쓸 것을 권한다(딤전 5:23). 예수님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심으로써 흥을 돋우셨다.

실제로 포도주와 같이 부드러운 술은 식사 때 반주용으로 적당량을 마실 경우 오히려 건강에 득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포도주도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딤전 4:4). 문제가 있다면 언제나 포도주가 아닌, 우리의 폭음이다.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독실한 크리스천들 가운데 포도주나 맥주를 마시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유독 한국 교회만이 술과 담배를 엄하게 금했던 것은 기독교가 들어왔던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과 서양 선교사들의 보수적 신앙 탓이었다.



술과 담배가 분명히 건강에 해롭고 가족이나 이웃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한국교회가 주초(酒草)를 금한 것은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음주의 경우 이것 때문에 구원이나 신심 여부가 결정되는 진리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와 양심 문제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전 10: 23)는 바울의 충고는 새겨들을 만하다.

만일 내가 폭탄주를 마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이웃에게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술 마실 수 있는 자유를 스스로 제한함이 마땅하다.



하나님 영광 가린다면 자제해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음주 소비량이 꾸준히 감소되고 있다고는 하나 음주 인구는 여전히 줄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청소년과 여성층에서 술을 즐기는 이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게다가 임산부의 음주나 음주운전으로 인해 태아나 애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해를 입히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 단주하는 것이 좋다.



일각에서는 독주를 과음하는 유해음주는 자제하고 부드러운 술을 적당히 마시는 건전음주는 권하기도 하지만 음주도 하나의 버릇이기에 애초부터 끊어야 한다.

홀짝홀짝 와인을 마시던 사람이 폭탄주를 돌리는 알코올 중독자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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